2008년 6월 19일 목요일, 망종절기 15일째
6교시(15시~15시 50분)에 모두모람을 가졌습니다.
정토회의 <미안하다 동포야>라는 캠페인에 동조하여 북한 어린이 돕기에 참여하고자 아침부터 아침공부 시간을 내어 북한의 형편, 서로 돕는 데 대해 짧은 이야기를 갖고서 오후 모두모람을 이용해 그 방안을 찾아보자 했더랍니다.
그런데 모두모람 분위기가 영 잡히질 않습니다. (이때 6학년 학생들은 생활수업에 참여하여 7,8,9학년만 임석했습니다.
6학년 학생들은 매주 월요일 6교시에 따로 자치활동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산만하고 제안은 진반 농반인 것도 같고, 무언가 집중하거나 진지해지질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먹는 데 꽤 민감해서 이걸 줄일 건 꿈도 못 꾸는 듯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굶는 사람 돕자는데 스스로의 불편은 아무것도 감내할 생각을 못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상했습니다. 회의를 중간에 접고 여러분끼리 이야기하라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나중에 스스로들 불편해했던 선택을 해서 나아왔습니다. 어느날 한 끼를 같이 굶고, 이 식비를 성금으로 내며, 이밖에 자유로이 모금함에 모금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는, 이 자리에 당사자들-북한 어린이 중 누군가나 그들을 대신하여 가족이나 이웃 중 누군가가- 대표로 찾아와 도움을 청했더라면 그들은 얼마나 큰 비참함과 모욕감을 맛보았을까, 그런 도움이라면 차라리 처음에 마음이 없다 거절하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연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자극받지 않은 일에 대해 아이들이 얼마나 현실감을 가질 수 있는가. 학생들에게 부당한 기대와 요구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촛불집회 참석도 그렇고 일면 일련의 선택들은 꽃피는 학교의 중등과정의 기본 색깔과 다른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다시피 매체나 전자기기의 사용을 자제 또는 금지하는 것은 학생들이 내면 세계와 자기 생활에 좀 더 집중하고 자기 감각을 일깨우는 데 경주케 하는 한편, 바깥에 대해서는 한 발 물러서 있게 만듭니다.
그것은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학교는 왜 또 아이들을 바깥으로 끌고 가고, 휴전선 너머의 세상 일에 관심을 갖게 할까요?
지금이 아니라도 그것은 돌아보며 성찰의 밑거름이 될 거라고 봅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속한 시대의 역사적 순간들, 장면들에 참여하면서 단박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 어른이 되어가면서 차츰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제공하는 것 또한 어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욱 효과적인 것은 아무래도 지속적인 관심과 생활주변에 노출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도 장면을 전달받을 때 사실만을 전달받지 않고 특정한 관점과 의견까지 같이 전달받곤 합니다.
아이들은 거기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장 부드럽고 완성도 높은 방식은 <생활의 노출>, 바로 곁에 사는 가장 가까운 어른들이 거기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일 겁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생활과 선택을 통해 아무런 강요나 설명 없이 자신들의 내면에 살아가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꽃피는 학교가 청소년평화꽃네트워크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게 된 것도 명시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그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요?
모두모람을 하면서 학생들의 선택과 깨우침에 학교나 교사가 갖는 일정한 한계를 경험합니다. 이제 이 부분은 부모님들의 힘으로 좀 더 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모두모람 풍경만 전하기에는 그것이 드러낸 그늘과 볕이 너무도 뚜렷해서 대강이나마 생각을 전해드립니다.
학생들에게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 자기 존엄을 내려놓는 것과 일정 정도 유관한 것임을 알리고 싶습니다.
남을 돕고자 한다면 제 몫을 내어놔야지 부모나 다른 이들에게서 끄집어내려 하지 말 것이며, 제 몫을 내놓을 테니 다른 혜택을 달라하는 것은 진심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오늘, 목요일 이야기는 글을 쓰고 있는 저의 사견입니다.
좀더 현명한 눈과 귀로 이 사태를 이끌고 계실 선생님들도 계실 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과 선택이 모든 견해 가운데 가장 탁발한 것일 지라도 그 과정상에서는 우리의 모자람과 고민들을 같이 나누는 것이 그리 의미 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모님들께서도 가슴 속에만 쟁여두지 마시고 일상의 소소한 고민마저도 나누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것들에 일일이 말로 답해야만 마음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서로 들어주는 가운데서도 우리 지혜가 자라날 거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마치 아킬레스건같은 희생을 선택했습니다. 그 의미를 깍아내리지 않고 싶습니다.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건 한끼를 걸러서라도 그 만큼의 배부름을 동포 어린이들에게 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격려하고 그 의미를 깊이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출처 : 꽃피는학교 이충환 선생님의 이야기

요즘 초등학교 6학년인 우리집 둘째아이가 자주 묻습니다.
"이 힘든 공부를 왜 해야해요? 이런거 안해도 잘 살 수 있는대 안하면 안돼요?"
참, 난감한 질문입니다. 제게는...
아니라 이야기 해 주어야 하는대 꼭 해야만 하는것이라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게 내 생각을 이야기 해주고 또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하는대...
마음과는 달리 입으로 나오는 제 이야기는 상당부분 말을 아끼고 아낀 축약된 내용만 나오곤 하지요.
이야기 해 주어도 이해를 못할거야. 이야기 해 주어도 자기 생각을 이미 굳히고 있을거야. 이야기 해 주어도 받아 들이질 못할거야...
참 불행하게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 나누어야 할 아빠의 마음이 벌써 닫혀 있는 경우가 많답니다.
학교와 선생님들께서 만나게 되는 일정한 한계. 그와 비슷한 느김이 될수 도 있겠네요.
나는 아이들에게 이것이 참으로 좋은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해주고 함께하고 남겨주고 싶은대 정작 그 모든것의 주인이어야 할 아이들은 주인이 아닌 객이 되는 경험.
아마,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서 아빠에서 아버지라 불리는 날이 되어도 지금의 이 한계점은 늘 존재 할것 같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선생님들께서 하기고 계시는것처럼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 주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이야기의 그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고 스스로가 주인이 될것이라는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다면요.
정말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행스럽다 여기는 것은 우리 꽃피는 학교는 그 가능성이 1%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다는것을 믿는 선생님과 부모님들 그리고, 그 대열에 합류할 아이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슴을 태우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장 가까운 미래에 모두 꽃으로 활짝 피어날수 있었으면 좋겠답니다.
그 안에 자그마한 힘이 되기를 노력하겠습니다.
선생님들께 감사함을 남기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