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정적 / 황동규

2006. 5. 4. 13:20읽을꺼리/마음에담은시

세 개의 정적 / 황동규

 

1
열 평의 마당
나머지는 외부다.
가을날
미물이 모두 떠난 집의 고요 한편에
목숨을 사각의 대문에 달고
남은 목숨은 마루위에 굴려 놓고
잘 익은 박과 도르래 우물을 뒤뜰에 두고
오래 더 놓임을 잊고 살아간다.
마당에는 은행나무가 바람에 잡혀
조심스런 첫 잎을 떨구고 있었다.


2
저녁 무렵
우물물을 길어 올린다.
오래 길들인 높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
길들인 깊이에서 삐꺽이는 소리.
나를 포기한 친구를 생각해 본다.
추억이 포기되지 않았구나,
울타리 안에 문득 확대되는 조망
두레박에 가득 차는 빛
보인다, 정신의 床위에 단념이,
황금빛 물을 다시 깊이 떨어 뜨린다.


3
열 평의 마당
풍로 위에서 물이 아프게 끓는다.
찻종에 반쯤 따른다.
얼굴에 감기는 김의 뜨겁고 흰 머리카락
짧은 온기 속에 몸을 맡기고
창 밖을 내다본다.
진눈깨비 친 길이 언덕 위에 눕고
행인이 가고 있다 가고 있다.
낯 모르는 그와 화해 한다, 오래오래,
개인 하늘에 한 마리 새가 한없이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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