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1
포도밭 이랑 사이사이로 가득하던
시린 햇살이 가웃가웃한 그늘로 흐려지면
벌겋게 달아 오른 화덕의 붉은 기운같던
엉거주춤 서있던 키작은 포도나무 한켠에서
연신 땀을 닦아내기도 지쳐 흐르는대로
놓아두던 내 손끝의 게으름이 퍼뜩 정신을 차린다.
한낮의 뜨거움 아래, 적당한 게으름이야
누가 보아도 안스러움으로 보여지지만
쨍한 여름볕 내려간 귀한 시간속에서
재게 놀리지 않아 손끝이 보임은 미안함이다.
2
눈을 크게 뜨면 그나마 기척이라도 보이더니
이제는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보이지 않게 되면
종종대며 포도송이 하나하나 챙겨내던 손을 내리고
툭툭 먼지묻은 손을 털어내어도 좋을 것이다.
장마철 계곡의 물처럼 흐르던 땀방울도 흐름이
멈추고 드러난 살갗마다 극성으로 덤비는 모기들을
철썩철썩 소리나게 털어내며 밭이랑 사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 나오면
뽀얗게 달려드는 포도송이마다 입혀진 하얀 봉투들이
오늘 내가 살아온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3
귀먹은 사람처럼 귀에 아뭇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해어름 무렵의 매미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크다.
이제 그만 일 손을 놓아도 되느니
이제 그만 눈길을 내게로 돌려도 되느니
웅장한 오페라 공연의 무게감처럼
진중하게 들려주는 그 소리에
어그적어그적 걸음을 걸어
포도밭 이랑 사이를 허적허적 빠져 나온다.
4
분명, 눈을 따갑게 찌르던 햇살이 사라졌건만
사위가 여전히 휘영청 밝은건 무슨 연유일까?
마주보기 두려울만큼 따갑던 눈부심이 주는 밝음
그 시원하게 트인 시계와는 다르니
지긋하게 눈을 내리감고 바라 본 시야는
참으로 편안한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새카만 하늘 가득히 채워진 점점의 별들을
모두 아우르는 달빛하나가 주는 풍경이다.
5
모공을 디디고 일어선 몸의 솜털이 느끼는 바람
신발 벗어던진지 오래인 맨 발이 느끼는 흙은 차가움
지그시 누른 눈꺼풀 사이로 펼쳐진 부드러운 풍경
아주 작은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리는 밤의 고요
하루 종일을 푸릇한 풀냄새와 통통 튀는 느낌의 포도송이와
주체하기 어려운 뜨거움과 엉거주춤한 자세와 시시로 얼굴을
콕콕 건드려대는 포도순들과 지내온 시간들이, 펑펑 소리내며
하늘로 오르는 폭죽의 화려함처럼 눈 부시지 않아도
눈 부시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6
그 순간의 하늘을 밝히는 걸까?
그리 밝혀져서 그 순간이 느껴지는걸까?
8월의 농익은 포도향기 그윽한
포도밭 이랑 한켠에서 만난 하늘은
배가 터지도록 맛난 음식을 먹고난 다음의
기꺼로운 포만감으로 붉은빛 흙에
등대고 누워 버리게 한다
누워,
좁은 가슴에...
넘치는 밝은 달빛과 초롱이는 별빛과
뭉클한 흙내음과 하나 되라 한다.
나를 내려 놓으라 한다...